글 수 306
우리 늙어 눈꽃으로 머리 덮이면
뒤편 산 중턱으로 자작나무가 무리 져 있고
낙엽 지는 참나무가 많은 푸른 숲이 있어 새소리가 들리며
앞으로 가까이 유유히 흐르는 강이 보이는 곳으로
마루에서 일어나면 강가에 흔들리는 억새꽃이 보이는
당신과 둘만이 쓰는 조그마한 시골집이 있어야겠어요.
앞마당 너머로 텃밭이 조금은 있어야 되겠죠.
봄에는 꽃씨를 뿌려 가끔씩 찾아오는 손님을 맞아야하고
여름날 툇마루에 앉아 누런 쌈장으로 더위를 한 움큼 싸서 먹을
시린 물보다 더 푸른 상추도 심어야 하겠죠.
겨우내 시원한 동치미 국물을 먹으려면 무도 심어야하고
초겨울이 되면 김장을 해서 우리 내외도 먹고
친정으로 찾아온 딸아이도 주려면 고소한 배추로 넉넉히 심어야겠어요.
그리고 한쪽으로 고추를 심어 가을날 앞마당에 멍석을 깔고
자식들 얘기로 고추를 말리는 그런 집에서 당신과 살고싶어요.
돌담 옆으로는 푸른 가을날 단풍이 들어 감나무 위 붉은 감으로도
멀리서 우리 집을 알아 볼 수 있도록 너 댓 그루는 심어야겠어요.
시골집 뒤편으로 당신이 좋아하는 오지항아리도 서너 개 묻어두어야겠어요.
당신 친구가 오랜만에 오셔서 겨울밤이 깊어지도록 세상 밖 얘기로
시장 끼가 돌면 어제부터 내린 눈이 쌓여 정강이까지 푹푹 빠지고
독 안에 김치를 꺼내서 펄펄 끓는 가마솥에 국수를 삶아 비벼먹으며
친구와 새벽이 창문 두드리는 것도 모르고 수다를 떠는 당신이 보고싶어요.
졸음이 눈꺼풀로 내려오면 조금 진한 헤이즐럿 커피를 마시며
학창시절 미팅 때 만난 남학생 얘기로 깔깔대며 입안을 헹구고
옆방서 코고는 남편 흉도 보며 아직 시집 못 간 딸아이 걱정으로
겨울밤을 하얗게 지새우는 그런 당신과 살고싶어요.
굵은 안경 너머로 보이는 이마의 주름이 흉하게 보이지 않고
희끗한 귀밑머리에 작년에 며느리가 생일 선물로 사준 올이 굵은 스웨터를 입은
당신의 무릎을 베개삼아 문지방 끄트머리까지 들어오는 햇살로
이불을 덮고 곤히 잠이 들고 싶습니다.
빈 가슴에 말라붙은 당신의 젓 가슴이 자식들 걱정으로 더 쳐져도
텃밭으로 파헤쳐진 당신의 손바닥에 고달프던 지난날이 시커멓게 피멍으로 물들어도
그런 당신을 사랑합니다.
다만 나의 작은 소망이 있다면 눈발 날리는 저녁 강가를 거닐 때
당신 품안에 내가 당신을 위해 만든 나의 시집이 들려있어 행복해하는
그런 당신과 어느 날 저녁 노을을 바라보며 둘이 나란히 누워
손잡고 마지막 가는 길도 함께 가도록........
그렇게 당신과 함께 돌아올 수 없는 먼 여행길을 가고 싶군요.
편지